배터리 ‘방해꾼’도 에너지로… 저장 순서 바꾼 발상의 전환
물을 전해질로 사용하는 배터리는 화재 위험이 비교적 낮고 가격도 저렴하지만, 많은 에너지를 빠르게 저장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 대학 연구진이 기존에는 배터리 성능을 떨어뜨리는 ‘방해꾼’으로 여겨졌던 반응을 오히려 에너지를 더 저장하는 데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면서도 빠르게 충·방전할 수 있는 차세대 물 기반 배터리의 가능성을 열었다.
우리 대학은 화학과 박선아 교수 연구팀이 금속과 유기 분자가 연결돼 미세한 구멍을 이루는 2차원 전도성 금속-유기 구조체(Metal–Organic Framework, MOF)를 이용해 배터리 안에서 전기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아연 이온(Zn²⁺)과 양성자(H⁺, 작고 빠르게 움직이는 입자)를 차례로 저장하는 새로운 전극 소재를 개발했다고 19일 밝혔다.
수계 아연이온전지는 물을 기반으로 한 전해질을 사용하는 배터리다. 전해질은 배터리 안에서 이온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 물질이다. 수계 아연이온전지는 불이 붙을 위험이 비교적 낮고 가격이 저렴하며 환경 부담도 적어, 많은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의 차세대 후보로 주목받고 있다.
아연 이온은 전하가 커 전극 안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어려워,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면서 빠르게 충·방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양성자는 작고 빠르게 움직이지만, 너무 많이 반응하면 부산물이 생겨 아연 이온의 이동을 방해한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양성자는 배터리 성능을 떨어뜨리는 ‘방해꾼’으로 여겨져 반응을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연구팀은 발상을 바꿨다. 양성자 반응을 없애는 대신, 아연 이온과 양성자가 저장되는 순서를 조절해 둘 다 에너지 저장에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를 위해 연구팀은 전극의 미세한 구멍 안에 양성자를 붙잡는 일종의 ‘저장 자리’인 아민(amine) 작용기를 넣었다. 아민 작용기가 특정 전압에서 양성자를 저장하도록 설계함으로써 아연 이온이 먼저 저장되고, 그다음 양성자가 추가로 저장되도록 한 것이다.
원리는 빈 병에 큰 자갈을 먼저 넣고, 자갈 사이의 빈틈을 고운 모래로 채우는 것과 비슷하다. 비교적 큰 아연 이온을 먼저 저장하고 이후 작은 양성자를 추가로 저장해 하나의 전극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압이 높은 구간에서는 아연 이온이 먼저 저장되고, 전압이 더 낮아지면 양성자가 추가로 저장됐다. 연구팀이 개발한 전극 소재 Cu₃(HHTATP)₂에서는 이처럼 아연 이온과 양성자가 서로 다른 전압 영역에서 차례로 에너지 저장에 참여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순서다. 양성자가 너무 일찍 반응하면 부산물이 생겨 아연 이온의 이동을 방해할 수 있다. 연구팀은 아연 이온이 먼저 저장된 뒤 양성자가 반응하도록 해 두 저장 과정이 서로 방해하는 것을 줄였다.
개발한 전극 소재는 0.5 A g⁻¹의 조건에서 368.7 mAh g⁻¹의 높은 저장 용량을 기록했다. 쉽게 말해 적은 양의 전극 소재로도 많은 전기를 저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충·방전 속도를 16배 높인 빠른 조건에서도 처음 저장 용량의 절반에 가까운 46.9%를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배터리는 충·방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양이 줄어드는데, 이번 전극은 빠른 충·방전에서도 상당한 저장 능력을 유지한 것이다. 또한 500회 이상 빠른 충·방전을 반복한 뒤에도 안정적인 성능을 보였다.
연구팀은 다양한 X-선 분석법을 통해 아연 이온이 먼저 저장되고, 이후 양성자가 추가로 저장되는 과정을 확인했다. 또한 양성자를 저장했다가 다시 내보내는 과정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번 연구는 다공성 전극 소재에서 고용량과 빠른 이온 수송을 동시에 구현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분자 수준의 설계를 통해 서로 다른 이온이 저장되는 순서를 제어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차세대 수계 아연 이온 전지 개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안전하고 경제적인 수계 아연이온전지가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면서도 빠르게 충·방전할 수 있는 새로운 설계 방법을 제시했다. 향후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에 활용되는 물 기반 배터리의 성능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KAIST 박선아 교수는 “기존에는 배터리 성능을 떨어뜨릴 수 있는‘방해꾼’으로 여겨졌던 양성자를 오히려 에너지를 더 저장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이번 원리를 다양한 전극 소재에 적용해 더 많은 에너지를 빠르게 저장할 수 있는 배터리를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POSTECH 박근찬 석박통합과정생 및 이규원 석사과정생(졸업)이 공동 1 저자로 참여한 이번 연구는 화학 분야 국제 학술지인 Chem에 7월 7일 자 게재됐다.
※ 논문명 : Sequential Zn2+–H+ Storage in a 2D Conductive Metal-Organic Framework for Advanced Aqueous Zinc-Ion Battery DOI: 10.1016/j.chempr.2026.103129
※ 저자 정보 : 박근찬 (공동 1 저자), 이규원 (공동 1 저자), 김강민 (제2 저자), 박선아 (교신저자)
한편,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사업 및 국가슈퍼컴퓨팅센터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김지한 교수, 다공성 물질 내 가스 흡착량 증진 가능성 제시
〈 김 지 한 교수, 정 상 규 석사과정 〉
우리 대학 생명화학공학과 김지한 교수 연구팀이 결함공학을 통한 다공성 물질의 가스 흡착량 증진법을 개발했다.
정상규 석사과정이 1저자, UC 버클리 화학과의 Günther Thiele 박사후 연구원이 2저자로 참여한 이번 연구는 국제 학술지 ‘네이쳐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11월 16일차 온라인 판에 게재됐다.
금속-유기 구조체(metal-organic framework, 이하 MOF)는 금속 클러스터와 유기 리간드의 규칙적인 배위결합을 통해 합성되는 결정체이며, 넓은 표면적과 수많은 공극을 지닌 물질로서 다양한 에너지 및 환경 관련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다른 결정성 물질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MOF는 완벽한 결정성을 가질 수 없으며 여러 종류의 결함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결함들 중 결정체 내 유기 리간드가 불규칙적으로 본래 자리에 결합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리간드 공공결함은 실험적인 기법들을 통해 공공결함의 밀도가 조절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기존 제시된 리간드 공공결함의 조절을 통한 결함 공학 기법을 특정 MOF 내 고립된 공극의 존재여부와 접목시켜 결함공학을 통한 가스 흡착 증진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지한 교수가 직접 개발한 그래픽 프로세서(GPU) 소프트웨어 코드로 초고속 스크리닝 기법을 활용해 실험적으로 합성된 12,000 가량의 MOF들로 부터 메탄 가스에 대해 상당한 부피의 고립공극을 가지는 MOF들을 계산적으로 선별했다.
고립 공극의 판별 작업에는 안정적 에너지 구간에 대한 플러드-필(flood-fill) 알고리즘이 사용됐으며 이는 마이크로소프트 그림판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색 채우기’ 기능과 동일한 알고리즘이다. 이를 통해 무한히 연결된 주 공극구조만 판별해내고 연결되지 않고 고립돼 존재하는 공극의 존재여부를 판단했다.
이후 많은 양의 고립공극이 파악된 MOF들에 대해 리간드 공공결함을 가상으로 결정 구조 내 도입했으며 리간드가 없어지면서 기존의 고립돼 존재하던 공극들이 주 공극구조와 합쳐지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스크리닝 작업을 통해 연구팀은 리간드 공공결함이 도입되었을 시 상당한 메탄 가스의 흡착량 증진을 겪을 수 있는 13개의 MOF를 최종적으로 선별했으며, 불과 8.33% 이하의 리간드 결함이 존재했을 시에도 최대 55.6% 의 메탄 가스 흡착량 증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본 연구팀이 제시한 리간드 공공결함을 통해 기존에 활용되지 못하던 고립 공극을 주 공극구조에 연결시켜 새로이 활용하는 기법은 단순한 가스 흡착량 증진 외에도 혼합 가스의 선택적 흡착, 반 영구적 가스 포획 등 다양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중견연구자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 그림 설명
그림1. 본 연구에서 사용된 플러드-필 알고리즘을 설명하는 도해와 플러드-필 알고리즙을 통해 고립공극이 판별된 MOF의 예시
그림2. 본 연구에서 선별된 MOF 중 두 가지 MOF의 공공결함 도입 전과 후(좌, 우)의 흡착가능 공간 비교